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문단 편집) === 제1회 === *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것은 신돈 집권 전 일이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작중에 그녀를 위한 영전(影殿)을 짓는다고 한 것을 오해한 것일 듯하다. 사실 노국대장공주를 위해 영전을 짓는 것은 신돈 집권시와 그 이후의 일이고, 신돈은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짓는 일을 반대하였다가 실각의 빌미를 만들었다. 더불어 영전을 짓는 과정에서 수많은 노역자들을 동원하고 사상자가 많이 나와 민심이 흉흉했던 것도 실제 역사적 사실. 모후인 공원왕후 홍씨나 심지어 하녀까지 국왕에게 간했으며, 간언을 했던 문하시중 유탁은 끝내 공민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 공민왕이 정도전을 보고 '뭐야 이 듣보잡은?'이라고 보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정도전은 공민왕이 죽기 전부터 총애했던 신진사대부로 고려사 '정도전 열전'에서는 "왕이 그를 매우 총애했다"고 기술했다, 30세의 젊은 나이로 신돈을 처벌하고 태묘에 제사 지낼때 일익을 담당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대에 이미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알려진 학자였기 때문이다. 비록 혈통상의 문제가 있었고, 후일 우현보에 대한 그의 처분[* 우현보 집안 사람들이 자신의 혈통 중 노비의 핏줄이 있다는 사실을 알린 것 때문에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 고신을 늦게 받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개국 당시 더 철저하게 박살을 내서 정몽주등과 가까웠던 우현보의 아들 셋을 죽였다고.]을 생각하면 그에 대한 컴플렉스도 있었겠지만, 그런 약점을 상쇄할 만한 장점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지금의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형부상서 정운경의 아들이었으며, 당대 최고 학자인 이색의 제자였다. 그의 출세는 적어도 공민왕대까지는 어느 정도 탄탄대로였던 셈이며, 그가 좌절을 겪는 것은 우왕때부터의 일이다. 그리고 본작에서와 달리 조선개국으로 완전히 틀어지기 전까지 동문들과 동료들과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47&aid=0002044420|이 문제를 비판한 기사]]. * 작중에서는 성균사예가 낮은 직품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종4품'''의 꽤 높은 직함이었다. 당시의 정도전 같은 30대의 젊은 관료가 종4품이라면 순조로운 출세이다. 거기에 아버지, 어머니의 줄초상(아버지 3년상 중 2년째 될때 어머니도 돌아가시는 바람에)으로 그는 20대의 절반인 5년간 관직 생활을 쉬기까지 했는데도 저 정도의 승진속도를 보였다. --이쯤되면 왜 열폭했는지 모르겠네.-- * 공민왕이 모니노가 신돈의 자식인가 의심하는 세간의 소문을 신경쓰는 묘사가 초반에 나오지만, 실제 사서에서 공민왕은 우왕을 확실한 자기 자식으로 여겼다. 다만 실제 그런 소문이 퍼진 건 맞고 공원왕후가 우왕의 출생을 의심했다는 것도 사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